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주-대평리 전투 (문단 편집) === 대평리 전투 === 7월 15일 대평리를 담당한 미 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적들이 야간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보고 경계를 철저히 시키면서, 강 너머의 마을들을 포격해 적들의 집결을 방해했다. 그런데 해가 지자 북한군 전차 3대가 포격 지원 속에 미군 진지에 공격을 가했고, 이에 미군도 전폭기를 요청해 한대를 격파하고, 나머지 두대는 숲속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후에도 보병들의 도하 시도가 두차례 이어졌으나 이를 미군들이 격퇴함으로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한편 포병들과 함께 논산으로 퇴각해 재정비중인 34연대는 이날 마구평리에 진지를 구축해 대전으로의 퇴로를 지키게 했으나 적들이 전방에 집중한 탓에 전투는 치르지 않았다. 또한 사단 예비로 물러난 21연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에서 교량과 터널의 폭파를 명령받고 11포병대대 C포대와 공병중대를 배속받은 채 옥천으로 진군했다. 7월 16일 새벽 3시 대평리의 미 19연대 진지를 뚫기 위해 [[Yak-9]]가 금강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뒤이어 무자비한 [[공격준비사격]] 속에 적들이 도하를 시도했다. 한편 미 19연대는 조명탄을 쏘아가며 이를 저지하려 했고 11, 13, 52 포병대대들도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조명탄 지원을 전담한 11포병대대원이 고각을 잘못 조정해 쏜 탓에 20여분간 암흑이 찾아왔고, 이 틈을 타 상당수의 적들이 도하에 성공했다. 결국 오전 6시 반 무렵에 연대 방어선 중앙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에 멜로이 연대장은 연대 [[본부중대]] 일부와 예비로 대기중인 [[M24 채피]], [[M16 하프트랙]] 차량들에게 1대대를 지원토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나머지 병력들은 두만리로 후퇴하나, 이곳도 도로가 차단돼 결국 뿔뿔이 흩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철수 도중 7월 16일 밤 [[금남면(세종특별자치시)|금남면의 두만리와 용담리 경계]] 인근 야산으로 피신했던 19연대 소속 30명의 부상병과 부상병을 위해 일부러 남았던 [[군종 신부]] 허먼 G. 펠홀터(Herman G. Felhoelter)가 북한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두만리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0012&acid=797|6·25 참전 미군, 허먼 G. 펠홀터 군종신부의 성덕]][[https://www.sj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46245|"용담리에서 순교한 군종신부 펠홀터를 아시나요"]] [[군종 신부]] 허먼 G. 펠홀터(Herman G. Felhoelter)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첫번째 군종신부가 되었으며 [[수훈십자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